강철구의 명예훼손 소송 건에 대한 여성지식인 67인의 의견서


1. KBS노조 강철구 부위원장은 자신을 가해자로 지목하여 성폭력 피해를 공개한 피해자들과 피해자의 자구 노력을 공론화하여 뒷받침하고자 한 '운동사회성폭력 뿌리뽑기 100인위원회'(이하 100인위)를 도리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였습니다. 일상적인 삶의 자리 곳곳에서 다양한 성폭력의 경험들에 노출되며 살아온 여성으로서, 또한 성폭력이란 고질적인 사회문제의 심각성과 그 해결에 얽힌 난맥상을 고민하는 연구자이자 성평등 사회를 지향하는 시민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이 구체적인 고소 사건에 접하여 우려를 금할 길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명예훼손'이라는 법적 장치가 개인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본연의 목적과 어긋나게 성폭력 피해자의 입을 막고 성폭력의 진실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은 결코 방관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건의 담당자 제위께 아래와 같은 의견을 토대로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와 100인위를 명예훼손으로 기소하는 것이 부당함을 탄원하고자 합니다.

2. KBS노조에서 1996년과 97년에 발생한 성폭력 사건은 강간미수와 강제추행이라는 현행법상의 성폭력범죄에 해당할 뿐 아니라, 일하는 여성들의 생존권과 노동권을 위협하는 직장내 성폭력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또한 노동조합 내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최근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른 운동사회 성폭력 문제의 일단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피해자들은 이미 사건의 고소기간을 넘긴 상황에서 또 다른 성폭력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뒤늦게나마 노조 내부에서 이 문제를 풀어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논란과 우여곡절 끝에 노조 부위원장으로 당선된 강철구는 성폭력 가해 사실을 단순히 부인하는 것을 넘어서 성폭력 피해자들의 주장을 "노조 위원장단을 반대하는 세력의 사주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근거없이 매도하였고, 더 나아가 성폭력 사건의 보다 철저한 규명을 촉구하는 피해자들과 100인위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3. 이번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우리는 성폭력의 피해자가 진실의 규명과 문제의 해결에 접근하는 과정이 얼마나 지난한가를 다시금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폭력은 대체로 제 3자의 시선이 부재하는 한적한 공간이나 사적인 자리에서 예측하기 어렵게 돌발적으로 일어납니다. 이 때문에 가해자는 성폭력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기가 용이한 반면, 성폭력의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 자신의 진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나 증인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말할 수 없다면, 우리 사회의 성폭력 문제가 해결되리라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폭력 사건의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진실의 규명 작업이 피해자의 발언과 진술에 상당한 정도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성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를 지목하여 자신의 피해를 진술하는 것조차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일이 당연시된다면, 이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발언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4.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이른바 '조합의 입장'을 내놓은 현 KBS 노조집행부와 가해자 강철구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배후세력의 '사주'와 '조종'을 받았다는 '음모'론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엄청난 수사들을 동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의 핵심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은 전혀 제시된 바 없으며, 해당 여성들이 거짓으로 성폭력 피해자를 자처하는 데 공모함으로써 이들이 얻는 구체적인 반사이익이 무엇인가를 적시하지 못하였습니다. 여성은 자신이 당한 피해사실을 말하는 것조차 스스로 하지 못하고 배후세력의 조종을 받아야 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에 우리는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성폭력의 사실 여부와 아무런 관련없는 음모설로 피해자와 100인위의 명예를 훼손한 것에 대하여 강철구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5.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스스로 성폭력의 피해자로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은 상당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며, 이들의 고통과 분노가 뒤얽힌 내면의 아우성을 막아서는 침묵의 벽은 아직도 두텁습니다. 강간사건의 신고율이 2.2%라는 한 조사의 수치가 웅변해 주듯이, 정절과 순결을 강조하는 전통의 뿌리가 깊은 우리 사회에서 각종 성폭력의 피해자는 여성의 몸가짐과 처신을 의심하는 따가운 질책의 시선에 둘러싸이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또 이번 사건의 성폭력 피해자들이 몸소 겪은 바와 같이 악의적인 소문, 회유와 협박은 성폭력 피해 사실을 밝힘으로써 이른바 '물의'를 일으킨 여성들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기도 합니다. 그간 성폭력 문제 해결의 원칙과 절차가 정비되지 않은 직장과 사회단체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가 일터를 버리고 떠나지 않는 한 해결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생존을 위하여 일터와 활동의 장을 포기할 수 없는 피해자들은 가해자와 업무상의 접촉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에, 또 가해자에 대한 일말의 반성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침묵하기도 합니다. 가감없는 성차별의 현장에서 한 개인의 인권을 유린하는 성폭력을 겪고 나서도 많은 여성들이 그 즉시 해결하려고 나서지 못한 채 긴 시간 홀로 괴로워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직접 성폭력을 당하지 않은 여성들에게도 잠재적인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단지 몇몇 피해자의 개인적 피해에 관련된 것만이 아니라 여성들의 생존과 인권에 직결된 사안인 것입니다.

6. 우리는 여기서 본 사건 뿐 아니라 100인위를 통하여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공개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의 동기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개별 성폭력 사례들의 피해자들은 저마다 자신이 겪은 성폭력의 경험을 자기만의 고통으로 삭이며 침묵해 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말하지 않음으로써 제 2, 제 3의 다른 피해자들이 생겼거나 생길 수 있다는 자책과 우려는 이들로 하여금 앞에서 지적한 그 모든 불이익과 추락의 위험을 감수하는 공론화의 길로 나서게 만들었습니다. 성폭력의 가해자가 성폭력을 자행하여 공동체를 파괴할 때, 진정 타자에 대한 배려와 공동체의 정의를 고민하고 실천에 옮긴 사람들은 오히려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하고자 한 피해자 자신들과 100인위였습니다. 이들의 활동은 조직을 파괴하려는 저열한 음모나 가해자 개인에 대한 앙심의 분풀이가 아니라, 성차별과 성폭력의 피해에 시달리는 사회적 약자들의 집단적인 의사소통의 과정을 거친 도덕적으로 자율적인 주체들의 판단이며, 성폭력 문제 해결의 공익성을 주장하고자 하는 시민의 발언이자 운동인 것입니다. 그간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의 법제화에 여러 모로 진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폭력 문제의 해결이 지연되고 있는 것은 이를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여 여성 일반의 생존과 인권이 걸린 공공의 문제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에서 여성단체들은 끊임없이 성폭력 문제의 공적인 성격을 거듭 강조해 왔으며, 이런 외침에 대한 사회적 반향은 점차 넓어지고 있다고 사료됩니다.

7. 100인위와 피해자들이 사건을 공개한 것은 개인적 한풀이나 사익(私益) 추구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성폭력이라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적극적인 시도가 사회적 약자의 일반적 권익을 신장하는 데 기여할 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공익'의 의미를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되리라고 봅니다. 고질적인 성폭력의 근절을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피해자들과 이들에 공감하는 많은 여성들의 주체적 노력이 어떻게 자리매김되느냐 하는 것은 그간의 반성폭력운동 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인권수준을 가늠하는 역사적 분수령이 될 것입니다. 이번 명예훼손 고소 건을 담당하시는 관계자 제위께서는 이 사건의 역사적 중요성을 충분히 감안하시어 현명하고 정의로운 판단을 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김수진 (<여성과 사회> 편집위원)
배은경 (한림대 강사)
신상숙 (국민대 강사)
양현아 (서울대 강사)
오정진 (성신여대 강사)
하정옥 (서울대 강사)
황정미 (<경제와 사회> 편집위원)
강남식 (성균관대 강사)
강이수 (상지대 교수)
강혜경 (안동대 강사)
공선희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권현정 (서울대 경제학과 박사과정)
권혜원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권김현영 (이화여대 여성학과 석사과정)
김경희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과정)
김귀옥 (경남대 북한전문대학원 객원교수)
김미현 (성균관대 박사과정)
김민정 (서울대 강사)
김선영 (보스턴대 임상심리 박사과정)
김수영 (고려대 강사)
김수정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김순영 (상지대 강사)
김영란 (한국여성개발원 연구원)
김은하 (중앙대 강사)
김재은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과정)
김태은 (숙명여대 여성학 석사과정)
김현숙 (서울산업대 강사)
김혜경 (한신대 강사)
남은영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문소정 (부산대 강사)
박경숙 (동아대 교수)
박정애 (숙명여대 사학과 박사과정)
박현우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과정)
박혜경 (서울시립대 강사)
박희경 (성균관대 강사)
방혜신 (서강대 강사)
백영경 (<여성과 사회> 편집위원)
손덕수 (효성가톨릭대 교수)
심영희 (한양대 교수)
안지민 ((주) e-knowhow bank 기획실장 )
안 진 (목포가톨릭대 교수)
양보현 (한남대 강사 )
오조영란 (캐나다 토론토대 과학사 박사과정)
유한희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윤정로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이남희 (상명대 강사)
이미란 (안양대 강사)
이미정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
이상경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이선옥 (이화여대 여성학과 석사과정)
이성림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과정)
이순영 ((사)한국여성연구소 사무국장)
이재인 (인하대 강사)
이정옥 (효성가톨릭대 교수)
이지영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과정)
이혜숙 (경상대 교수)
이혜화 (숙명여대 여성학과 석사과정)
이화진 (한양대 여성학과 석사과정)
장귀연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장미경 (연세대 강사)
정민승 (한국디지털대학 교수)
정진성 (서울대 교수)
정현백 (성균관대 교수)
최선영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과정)
최정은정 (홍익대 강사 )
허 은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과정)
홍명순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