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구의 명예훼손 소송 건에 대한 서울대 대학원생 17인의 의견서


1. 우리는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이하 100인위)를 통해 알려진 KBS노조 부위원장 강철구 성폭력 사건에 있어, 가해자인 강철구가 피해여성들과 100인 위원회 등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것에 대해 본 의견서를 제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가해자 강철구가 이 사건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함으로써, 오히려 본 사건의 본질이 '성폭력' 범죄라는 것을 왜곡·은폐시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개인의 명예훼손에 관련된 것을 넘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이 법적으로 어떻게 다루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고려하여 올바른 판단으로 가해자의 고소의 부당성을 명백히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 우리가 본 의견서를 쓰게 된 것은 한국사회의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고통과 100인위의 성폭력 근절을 위한 노력에 대한 공감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 사건의 현장에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성들의 진술이 진실이라고 느끼는 것은 100인위가 제시한 제반자료와 정황뿐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경험해왔고 또 경험하고 있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폭력은 같은 사무실이나 강의실에 있는 어떤 남성에 의해 행해질 수도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의 문제는 흔히 여성 개인이 불시에 닥칠지 모르는 위험에 늘 긴장하고 조심해야 하는 '방어'의 차원으로 환원되고 축소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성폭력은 가해자 개인의 도덕성 결여 차원을 넘어서 여성에 대한 폭력 자체가 일상화되어 있는 사회구조의 문제인 것입니다.

3.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성폭력 문제의 해결이나 가해자의 처벌 이전에, 피해자가 스스로 자신의 성폭력 피해를 밝히는 것조차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에 대해 암묵적으로 침묵을 강요받는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피해자 자신에게 피해사실이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피해사실을 밝히는 순간 오히려 자신의 행실에 대해 추궁 당하고 의심받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본 사건의 피해자들처럼 조직활동을 하는 경우, 자신의 피해사실을 밝힐 때 주변사람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리라는 점도 결코 간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직장 내 상사에 의한 성폭력의 경우 성폭력 사실을 알림으로써 상사와의 관계에 위험이 생긴다는 것은 생존권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되기도 합니다.
'성폭력 피해자는 침묵한다'는 생각은 일반적으로도 널리 퍼져 있어, 자신의 피해를 신속하게 알리면 오히려 '정말 피해를 입었다면 그 정신적 충격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저렇게 빨리 대처하기 힘들었을 것인데, 저렇게 즉각 대응하는 것을 보니 계획적인 것이 아니냐'라는 의심을 받기도 합니다. 한편 고민 끝에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사실을 밝히기로 마음먹게 되면, '왜 하필 지금이냐'라는 의문과 함께 음모설로 치부되거나 이미 고소기간이 지나 어떻게도 대응하기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단적으로 말해, 이제 성폭력 피해자는 침묵하지 않으면 '꽃뱀'이라는 비난을 듣거나, 본 사건처럼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4. 이 사건에서 이와 같은 '발설의 부담'을 딛고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사실을 밝히게 된 것은 다시는 이러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바램에서였습니다. 사건 발생 이후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피해자는 자신 외에도 다른 피해자가 또 생겨나고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 단체내부에서 본 사건을 공개하였을 때 겪은 갖은 협박, 회유, 비방 그리고 개인적으로 예상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본 사건의 피해자들은 침묵이 재발을 낳는 악순환 고리를 깨기 위하여 사건을 공개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따라서 피해자들의 행동은 개인적인 분풀이가 아니라 성폭력 피해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는 모든 여성들의 인권보호를 위한 것입니다.

5. 피해자와 100인위가 문제해결의 방법으로 실명공개를 택한 것은 또 다른 제 3, 제 4의 피해자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여겨집니다. 사건 공개를 결심할 당시 이미 두 피해자에게는 더 이상 문제제기 할 수 있는 통로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으로 침묵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 사실에 대해 알리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동일한 일이 반복될 것임이 명백했으며, 실제로 자체 진상조사 결과 또 다른 피해자들이 나타났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체 내부에서는 해결책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들이 각종 음해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그 침묵을 깨고 나올 수 있는 다른 방안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결단은 일차적으로 더 큰 성폭력 피해를 막으려는 자구책이며, 피해자들을 침묵시키는 것으로 문제를 덮어두려는 우리 사회에 대한 고발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100인위의 사건공개는 강철구 개인에 대한 비방이 아니라 공인 강철구에 의해 자행된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이며, 또 다른 성폭력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소속집단 내부의 반성을 촉발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6. 더불어 우리는 이 사건이 사회적으로 의미하게 될 바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 사건이 명예훼손으로 판단된다면, 이는 아직 사건이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되지 않았으나 공소시효가 지나버린 채 남겨진 수많은 다른 피해자들을 영속적으로 침묵하게 할 것입니다. 더욱이 그러한 강요된 침묵을 법의 이름으로 정당화시키는 것이 될 지도 모릅니다.
또한 100인위가 공익적 목적을 위해 활동하였음을 상기할 때, 100인위에 대한 기소는 아직도 침묵하고 있는 다른 수많은 성폭력 피해여성에 대한 여타의 조력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될 것입니다. 나아가 이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를 위해 행동하려는 다른 모든 이들 역시 의기소침하게 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검찰에서는 지금까지 침묵 당해온 피해자들의 억울함과 100인 위원회의 공익적 취지, 그리고 이 사건이 의미할 수 있는 사회적 파장을 고려하시어 이 사회의 성폭력 근절을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는 판단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곽현자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박사수료)
김수아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박사과정)
김신명숙 (서울대학교 여성학 협동과정 석사과정)
박명숙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대학원 미술사 전공 석사과정)
박선영 (서울대학교 여성학 협동과정 석사과정)
박지하 (서울대학교 여성학 협동과정 석사과정)
부가청 (서울대학교 여성학 협동과정 석사수료)
심정숙 (서울대학교 여성학 협동과정 석사과정)
염찬희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박사수료)
윤소영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대학원 미술사 전공 석사과정)
이박선형 (서울대학교 여성학 협동과정 석사수료)
이영화 (서울대학교 여성학 협동과정 석사과정)
이헌미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석사과정)
최은경 (서울대학교 여성학 협동과정 석사과정)
최이숙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석사과정)
최정연보 (서울대학교 여성학 협동과정 석사과정)
최정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석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