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재헌 검사님께

안녕하십니까?

사회가 복잡해지고 모든 일을 법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늘어나는 업무를 처리하느라 노고가 많으실 것으로 사료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의견서를 내게 된 것은,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되었던 강철구(현 KBS 노동조합 부위원장)씨가 그에게서 성폭력을 당했다고 진술한 피해자들과 이 사실을 인터넷에서 실명 공개한 '운동사회내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 (이하 '100인 위원회')를 지난 2월 26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사건을 접하면서 사회적으로 우려스러운 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100인 위원회'가 성폭력 피해 사실을 인터넷에 공개한 것은 사회적 측면에서나 법적 측면에서 매우 커다란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중차대한 의미에 주목하여 그 논의의 추이를 진지하게 관찰하고 토론한 바 있으며, 이 논의를 계기로 만성화된 한국 사회의 남녀차별적 문화가 혁파되고 앞으로 남성중심적 성문화와 성관행으로 상처받는 여성 피해자들의 고통과 눈물이 이 땅에서 사라질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명예훼손 소송으로 비화되면서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이 자신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발언한 최후의 목소리마저 법의 논리에 의해 억압당할지도 모른다는 점에, 또 법의 논리에 의해 피해자가 가해자로 뒤바뀌는 기막힌 상황이 발생할 지도 모른다는 점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이 문제를 함께 논의하고 고민하던 남성 사회학연구자 24인은 법이 여성들의 사회문화적 인권보호의 대들보 역할을 담당해주리라는 기대를 안고서 다음과 같이 의견서를 제출합니다.


2001년 4월 25일

서명자들을 대표하여 박 영 도 드림




KBS 노조 부위원장 강철구의 명예훼손 고소 건에 관한
남성 사회학연구자 24인의 의견서



1. 강철구 명예훼손 고소 건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는 뿌리 깊은 남성중심적인 성문화와 성관행 때문에 여성 성폭력 피해자가 진실을 규명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얼마나 힘들고 먼 길인지를 절감하였을 뿐 아니라, 이 과정 속에서 성폭력의 특수한 상황이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도 확인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번 명예훼손 고소 건은 단순히 실명 공개로 인한 개인의 명예훼손이라는 단편적 맥락이 아니라 사건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성폭력의 특수한 상황과 그 사회적 의미를 고려하여 판단이 내려져야 한다고 봅니다.

2. 우리 나라 현행 법률상 명예훼손에서 면책될 수 있는 사유는, 그 적시된 내용이 사실이고, 그 사실을 적시하는 것이 공익에 필요한 것일 때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명예훼손 여부를 판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공소시효와 관계없이 성폭력의 사실 여부를 분명히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은밀한 장소에서 발생하는 성희롱이나 성폭력의 경우 당사자가 아닌 제 3자가 증언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근본적 어려움이 있습니다. 또한 이 점을 악용하여 대부분의 가해자가 가해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어서 진실 규명의 어려움이 더해집니다. 그리하여 성희롱이나 성폭력의 이러한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통상의 법률적 기준을 따르는 경우, 직접적인 피해자인 여성들이나 잠재적 피해의 위험을 항시 안고 있는 여성 일반에게 법률이 더 이상 의지할 곳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보호하게 되는 심히 우려스러운 사태가 생기기도 합니다. 이번 명예훼손 고소 건과 관련된 성폭력 사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미 알려졌듯이 KBS 노조는 자체 조사를 거쳐 강철구 씨에 대해 징계 조치를 내린 적이 있습니다. 강철구씨를 비호하고 있는 노조 자체가 성폭력의 특수성에서 비롯되는 진실 규명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조치를 취했다는 것은 ‘100인 위원회’에서 공개한 성폭력 피해 진술이 사실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또 한 가지 주목하고 싶은 점은 '100인 위원회'의 성폭력 가해자 실명 공개가 단순히 사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성폭력을 유발하는 우리 사회의 여성차별적 사회문화의 틀을 바꾸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건의 전개과정 자체가 이 점을 잘 보여줍니다. 일반적으로 성폭력의 여성 피해자가 문제를 해결해 가는 단계에서 피해자는 유형 무형의 압력을 받으며, 또한 그 압력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목소리를 막기 위해 기대하거나 동원하는 압력이기도 합니다. 실명 공개는 이러한 압력들에 내몰린 피해자들의 불가피한 선택이자, 이 압력들에 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궁극적으로 성폭력을 근절시키는 공공 이익을 추구하려는 노력이라고 봅니다.

1)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이번 사건에서도 처음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는 혼자서 그 충격과 고통을 감수하고 해소해보려는 해결책을 모색했습니다. 여성 피해자가 초기에 이러한 해결책을 찾는 것은 우선 개인적 충격과 수치심, 문제 제기의 사회적 부담, 문제 해결 가능성의 희박함 등등 때문에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기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지만, 나아가 그것 자체가 이미 우리 사회에서 여성 피해자뿐만 아니라 여성 일반에게 직접적, 간접적으로 부과되는 강한 남성중심적 문화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성희롱 내지 성폭력 피해자에게 ‘어떻게 행동했기에 그런 일이 생기느냐’는 식으로 오히려 돌을 던지는 것은 바로 뿌리 깊은 남성중심적 문화의 생생한 사례입니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성장한 한 개인이 그 문화적 압력(혹은 폭력)을 넘어서기가 어렵다는 사실은 누구나 절감하는 현실입니다.


2) 이번 사건의 여성 피해자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 안에서 동일한 가해자에 의한 동일 유형의 피해자가 있음을 확인하고 개인적 해결책의 수준을 힘겹게 넘어서서 단체 내부에서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고 공적인 해결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경우 해당 단체는 조직을 보호한다는 명분 하에 문제를 축소/은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번 사건의 해당 단체는 가해자로 지목된 강철구씨에게 ‘경고’라는 가벼운 징계조치를 취했습니다. 이것은 성폭력 사실 자체는 인정한 것이지만, 해결책으로서는 미흡한 조치였으며, 더욱이 피해자들은 회유와 비방, 각종 음해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해당 단체 내부에서 문제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문제의 본질조차 왜곡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일반적으로 성폭력 피해자들은 성폭력 자체에서 일차적인 정신적 상처를 경험하지만, 성폭력 사실에 대한 주장이 주변 사람들이나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 안에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비난받게 될 때 이차적인 정신적 상처를 겪게 됩니다. 그리고 그 충격은 일차적인 정신적 상처보다 더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사건의 여성 피해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3) 그렇다면 자신이 신뢰하고 있던 소속 집단 내부에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비난이 돌아올 때 피해자들이 호소해야할 방법은 이제 무엇이겠습니까? 피해자와 ‘100인 위원회’가 문제 해결의 방법으로 실명 공개를 택한 것은 문제를 제기하고 논의하고 해결해갈 수 있는 통로가 막힌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었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실명 공개는 실명 공개 없는 문제 해결책을 가로막은 다양한 유형의 문화적 압력 및 조직내부의 압력에 의해 불가피하게 강제된 선택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것은 사적 이익이나 개인적 감정 때문이 아니라 또다른 성폭력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성폭력의 피해에 대해 침묵을 강요하는 각종 조직이나 사회 전체에 각성과 반성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성폭력과 인권침해가 없는 평등한 남녀관계의 형성을 지향한다면 성폭력을 유발하는 사회의 잘못된 관행과 문화를 바로잡는 일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실명 공개는 '남녀가 평등한 사회 구현'이라는 '공공 이익'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동안 사생활이라는 보호막 속에서 감추어져 있던 은밀한 성폭력과 인권침해를 공공에게 드러내는 작업은 이러한 '공공 이익'을 위해 필수적인 과정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생활이라는 이름 속에 묻혀진 일상적 성폭력에 시달려온 숱한 여성들은 언제쯤이나 공공의 이름을 얻어 성희롱과 성폭력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날 수 있게 될 것입니까? 다수의 시민단체들이 ‘공동 대책 위원회’를 구성하여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것도 이러한 공공 이익의 추구에 동감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4. 사회 도처에 만연해 있으면서도 강요된 침묵의 늪에 빠져 있는 성폭력 실태를 공적 토론의 장으로 끌어내어 토론의 반성적 힘을 통해 사회 전체 차원에서 이성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고 촉구하기 위해 피해자들과 ‘100인위’는 최후의, 그러나 공익에 입각한 온당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에 대해 강철구씨는 명예훼손 고소로 대응했습니다. 이제 여성 피해자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가로막는 유형 무형의 사회문화적 압력과 단체 내부의 압력을 거쳐 법적 압력의 위험에 처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지금까지의 과정에서 계속하여 무시되고 모멸받았던 피해자들의 목소리와 몸부림이 이 사회에서 공적으로 인정받을 것인지, 아니면 피해자들이 가해자로 뒤바뀌어 세 번째 정신적 상처의 엄청난 좌절과 고통에 시달려야 할지가 이제 법적 판단에 맡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법의 정신'이 우리의 우려를 깨끗이 씻어버리게 되기를 기대하는 바입니다.

I)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이번 사건과 같은 경우 명예훼손의 법적 논리가 자칫 인구의 절반인 여성들이 처해 있는 성폭력의 잠재적 공포를 고려하지 못하고 그들이 집단적으로 겪는 인권침해를 방치할 위험이 있다는 점입니다. 가해 남성들은 성희롱이나 성폭력 사실이 공개되면 피해자인 여성이 더 비난받을 것이라고 협박하면서 사실공개를 막아보려고 합니다. 그러다 막상 공개되면 자신들이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반발합니다. 그렇다면 감추든 공개하든 정신적, 정서적 피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여성들의 훼손된 명예는 누가 보호해줄 수 있습니까? 성적인 문제로 명예가 훼손되었다면 그것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치명적인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닙니까?

더욱이 이 땅의 여성들에게는 자신의 인격과 권리가 이렇게 상처는 받기 쉽고 보호는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 현실입니다. 남녀차별적 의식과 관행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는 우리 사회에서 남성들은 성장기에 여성을 비하하고 성적 도구로 취급하는 말투와 문화를 형성하는 경향이 강한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남성중심적 문화와 가치관은 여성을 하나의 독립적 인격체로 보면서 성관계에서도 서로 합의된 정서적, 감정적 교류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그야말로 당연한 규범의 형성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성희롱과 성폭력을 행하고 또 정당화하려는 남성들의 사고의 근저에는 바로 이런 왜곡된 문화와 가치관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여성들의 몫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성들이 일상생활이나 조직 속에서 입는 성폭력과 인권침해는 개별적 사건을 넘어서는 사회적 굴레인 것입니다.

또한 여성들의 이러한 집단적 고통과 상처는 개인의 주관적 권리를 보호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 근대 법률의 언어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사회적 현실입니다. 이러한 엄연한 객관적 현실을 사상하면서 개인적 명예훼손 사실에만 주목하는 법의 논리는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의 인권만이 아니라 성폭력의 일반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여성들의 집단적 인권침해 상황을 방치하는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 이 땅의 여성들이 성폭력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야한다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기본적인 합의를 가장 앞서서 구현하고 지켜나가야 할 법에 의해서조차 그 합의가 무시되고 폐기되는 비극적 결과가 빚어질 것입니다. 가해자의 웃음 뒤에 뿌려질 수많은 현실적, 잠재적 피해자들의 고통과 좌절의 눈물,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2) 그러나 근대법의 진정한 정신은 추상적 법규의 기계적 적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고도 깊은 고통과 상처에서 터져 나오는 변화의 목소리를 열린 태도 속에서 받아들이는 데 있다고 봅니다. 보편성을 담보하는 법적 추상성의 본질은 경직된 적용을 강요하는 폐쇄된 추상성이 아니라 시대의 합의된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항시 재해석에 열려 있는 개방적 추상성에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근대 법률은 그 제정 과정에서나 적용 과정에서 시대의 문화적, 역사적 요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봅니다. 근대법의 개인주의적 어법이 이러한 정신과 구조를 가로막는 요인은 되지 않을 것이며, 또 이 정신과 구조가 작동한다고 해서 근대법의 기본 어법이 파괴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개인의 인권을 진정으로 지키는 길은 개인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인권 상황을 지켜줌으로써 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폭력의 야만을 근절시켜야 한다는 우리 시대의 요구이자 부정할 수 없는 보편적인 합의는 개인의 인권과 사회적, 집합적 인권 상황의 긴장 속에서도 마땅히 충족될 수 있고 또 충족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때 법은 시대의 변화를 이끄는 적극적 역할을 충족하게 되리라고 봅니다. 우리가 우려 속에서도 법에 대한 기대를 잃지 않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상처받은 다수가 힘겹게 발설한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법률적 판단을 통해 법이 사회 정의와 보편적 인권의 편에 서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려주시기를 기대하며, 또한 이 과정을 통해 많은 여성들에게 정신적, 정서적 피해를 안기는 부당한 행위들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행해왔던 남성들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스스로 반성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져 우리 사회가 한층 더 성숙한 단계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강성현(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과정)
김도균(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과정)
김민환(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김백영(천안 나자렛대 강사)
김종엽(한신대 사회과학부 교수)
김행석(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과정)
나재흠(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
박대진(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과정)
박영도(한국정신문화연구원 초빙연구원)
박찬종(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과정)
박형민(서울산업대 강사)
안성우(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과정)
유형근(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과정)
이동렬(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과정)
이인규(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정상준(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과정)
정영신(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과정)
정영철(동국대 강사)
정준영(인천교대 강사)
정지욱(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과정)
정태석(동해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조정우(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
주은우(미국 캔자스대 방문연구원)
현민(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과정)

이상 24명(가나다 순)